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문단 편집) === 미국 === >"핵폭탄은 위대한 결정이 아닙니다. 그저 정의의 무기고에 있는 강력한 무기 중 하나일 뿐입니다." >---- >[[해리 S. 트루먼]] 前 [[미국 대통령]] 일본에서 나온 작품에는 핵폭탄 투하 소식에 미군 장병들이 죄책감을 갖고 숙연해하는 장면이 가끔 나온다.[* 장병들보다는 원자탄의 개발자인 오펜하이머 등 과학자들 일부가 이런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전혀 사실이 아니다. 나치의 항복 선언을 듣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듯이 당시의 미군 장병들은 핵폭탄으로 전쟁을 끝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나 기뻐서 전쟁을 끝내준 해리 S. 트루먼 대통령 각하께 너무 감사했다고''' 한다. [[반자이 돌격]]이나 [[카미카제]] 등 일본군의 미친 짓들을 보며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던 미군 장병들은 지긋지긋한 전쟁을 빨리 끝내준 걸 반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전선에서 환경적 배경으로 보나, 적군들의 특성으로 보나 태평양 전선에서의 미군들은 유럽 전선에서 [[독일]], [[이탈리아]] 등과 싸운 미군들보다 훨씬 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더욱 괴로워했다. 물론 서부 전선에서의 미군들도 큰 고통을 받았지만 그만큼 [[태평양 전쟁]] 전선이 지옥 같았다는 뜻.] 무엇보다도 당시 핵무기의 정확한 위력과 후폭풍은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원폭 피해자 등을 담은 끔찍한 사진들은 검열되었다. 그래서 당연히 [[미국]] 본토에서도 딱히 동정심이나 죄책감 같은 건 가지지 않았고 가질 이유가 없었다. 또 국민적 인식과 프로파간다 역시 한 몫 했는데, [[제2차 세계 대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그래도 [[중국]]과 더불어 [[동양]]의 경제대국이라는 인식이었지만 일단 [[진주만 공습]]으로 본토가 사전 통보 없이 공격 당한 분노가 큰 데다가 [[학살]], [[포로 학살]], [[반자이 돌격]], [[카미카제]]처럼 인명 따윈 장식으로 여기는 [[일본군]]만의 미친 짓거리 등등 이해할 수 없는 문화, 동양인 [[인종차별]] 역시 적개심의 원인이 되었다. 승리의 영광으로 우쭐거리던 [[유럽]] 전선 폭격과는 다른 감정이 들었던 것이다. 즉, 죄책감을 가질 이유가 없었고 이는 폴 티비츠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2005년 원폭 60주년을 맞아 '원폭은 필요했고 우리는 죄책감이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다음 해 티비츠 자신은 요미우리와의 인터뷰에서 "똑같은 상황이 된다면 똑같이 할 것"이라고 솔직하게 인터뷰했다. 티비츠는 원폭 투하로 전쟁을 끝낸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티비츠는 전역 후에 원폭 투하를 흉내내 [[버섯구름]]을 재현하는 에어쇼를 벌인 적도 있으며, 이 때문에 [[미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게 사과를 한 적도 있다. 티비츠는 2007년 [[심부전]]증으로 사망하게 되는데, 유언으로 자신의 장례식을 치르거나 묘의 비석을 만들지 말아달라고 했다. 이는 일본인들의 시위나 묘소 테러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뜻대로 그의 시신은 [[화장(장례)|화장]]되어 재가 [[영국]] 해협에 뿌려졌다고 한다. 티비츠를 포함해 [[https://pgr21.com/pb/data/humor/1542626842_Screenshot_20181117_211047_DaumCafe.jpg|조종사 상당수는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았으며]], 전쟁을 끝내기 위해 선택한 정당한 수단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199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50주기를 맞이하여 당시 [[MBC]]에서 에놀라 게이를 몰던 조종사(티비츠는 아니었다) 중 하나를 찾아가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는 "나는 전쟁에서 일본에 의해서 죽을 뻔한 수백 만의 연합국 국민들을 구했습니다. 조금도 원폭 투하에 대하여 죄책감을 가지지 않습니다. 일본이 원폭을 가졌더라면 그들은 더했을 겁니다."라 언급했다. * 기장 폴 티비츠: 1975년 인터뷰에서 '''"나는 맡은 바 임무를 완벽히 수행한 것에 대해 자랑스럽습니다. 매일 밤마다 잠을 잘 잡니다."'''라고 했으며 2005년에는 '''"만약 같은 상황이 또 다시 내게 주어진다면 똑같이 할 것입니다."'''라고 발언했다. 또 2005년 [[BBC]] 다큐멘터리에서는 "나는 맡은 바 임무를 다했으며 그것이 성공적으로 끝나 다행스럽습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2007년 사망하기 전의 마지막 인터뷰에서도 "'''올바른 일을 하기 위해서'''" 라고 말했다. [[http://www.dailymail.co.uk/news/article-491170/Pilot-dropped-atomic-bomb-Hiroshima-dies-regrets.html|#]] * 폭격수 토머스 W. 페러비: 폴 티비츠처럼 폭탄을 투하한 일에 대해 결코 후회한 적이 없다.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것이) 해야 될 일이었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http://en.wikipedia.org/wiki/Thomas_Ferebee|#]] * 레이더 담당 장교 제이콥 베서: '''"내가 한 일에 대해 슬퍼하거나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진주만 공습|진주만]]과 [[일본의 전쟁범죄|일본이 한 잔학 행위들]]을 기억합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http://en.wikipedia.org/wiki/Jacob_Beser|#]] * 항법사 시어도어 J. 밴 커크: 똑같은 상황이 다시 주어질 경우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네, 저는 다시 할 겁니다. 우리는 5년간 전쟁했고 항복하지도 패배를 받아들이지도 않는 적과 싸웠습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 사람은 나중에 [[비키니섬 핵실험]]에도 참가한 바 있다. [[http://en.wikipedia.org/wiki/Theodore_Van_Kirk|#]] *부조종사 로버트 A. 루이스: 폭탄 투하시 "맙소사,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겁니까?"라고 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도 죽을 때까지 그의 임무를 후회한 적은 없었다. 때문에 저 발언은 '우와, 우리가 방금 떨군 게 저렇게 센 거였어?' 같은 뉘앙스로 폭탄의 엄청난 위력에 놀란 것으로는 볼 수 있을지라도 후회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다만 전후 일본 쪽 방송에 나와 원폭 투하 당시의 감상을 묻는 진행자에게 위 기록과 같은 말을 하면서도 피폭자를 돕던 어느 목사에게 지원금이라고 수표를 주고 간 기록도 있어 원폭 투하 이후 생각이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는 인물이다.[[https://news.yahoo.co.jp/articles/779de2c2453ba4503c129efa4a2e3285802c3e64?page=4|#]] * 부 항공 기관사 로버트 슈머드: "어느 사람의 다리에 괴저가 생겨 반드시 절단해야만 한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그 다리를 절단해야 했습니다. 그 괴저(일본)는 세계에서 반드시 제거되어야 하는 [[암]] 덩어리였습니다."라고 1960년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 유일하게 죄책감을 보였다고 알려진 것은 기상 정찰 임무를 맡고 에놀라 게이보다 1시간 먼저 비행에 나섰던 스트레이트 플러쉬의 클로드 이덜리 소령이었다. 그는 한두 번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고, 직접 히로시마에 사과 편지를 보낸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적반하장으로 그의 사과 편지를 읽자마자 불쾌한 내색을 보였으며 가짜라고 선언한 다음 사과 편지를 불태워버렸다. 이덜리 소령은 나중에 위조죄로 감옥에 가기도 하고 [[정신병원]]에 수감되기도 했다. 하지만 기자 겸 작가 William Bradford Huie는 그의 사죄의 진위성이 의심스럽다고 밝혔는데, 이유로 전후 이덜리 소령이 몇 년간 핵폭탄 투하 훈련을 계속 수행했다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다. 때문에 [[프로파간다]]를 위해 반핵주의자들이 날조하고, 이덜리 소령 자신은 명성을 얻거나 주의를 끌고 싶어서 그랬다고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기장인 폴 티비츠는 그에 대해 "폭탄이 떨어질 때는 거기 있지도 않았으면서 무슨 죄책감을 느낀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http://en.wikipedia.org/wiki/Claude_Eatherly|#]] 이는 당시에는 핵폭탄이 단순히 엄청나게 강한 폭탄으로만 인식되었으며 핵폭탄이 무서운 이유인 [[방사능 피폭]]에 대한 인식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몰락작전]]에 핵폭탄을 투하시킨 곳에 병력을 진군시키는 계획이 있었을 정도로 군 상층부조차 피폭에 대한 인지가 전혀 없었다. 실제로 피폭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던 맨해튼 계획의 과학자 중에서는 반응이 둘로 나뉘었다. [[리처드 파인만]]의 회상에 따르면 대다수는 환호하면서 파티를 열었지만 그 중 몇 명은 구석에서 그의 표현에 따르면 '궁상을 떨었으며' 대부분 반전, 반핵 운동의 길로 빠졌다고 나온다. 대표적인 예시가 원폭 실험 후 "이제 우린 다 개새끼들이다."라고 한 케네스 베인브리지나 핵무기 제조를 주도했으면서도 반핵에 힘을 쓴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있다. 파인만은 [[존 폰 노이만]]의 영향을 받아 폭탄에 대한 죄책감은 가지지 않았으나,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보며 저 일상이 폭탄이 터지면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허무함을 느낀 적은 있었다고 밝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